철학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훑어줘서 철학 입문자에게 좋은 책인 것 같다. 이전에 피로사회를 읽어서 그런지 문체가 비교적 쉽게 느껴졌고, 약간의 위트도 가미되어 500쪽에 달하는 데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각 챕터마다, 철학자마다 인상 깊은 내용이 많았지만 기억에 남는 내용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스토아학파의 이야기를 꼽겠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테니스 경기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기를 펼칠 것.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말 것.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마르쿠스는 골치 아픈 사람에게서 영향력을 뺴앗으라고 제안한다.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자격을 빼앗을 것. 다른 사람은 나를 해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나를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옳은 말씀이다. 왜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신경 쓰는 걸까? 생각은 당연히 내 머리가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나는 궁금하다. 짧은 두 마디 말이지만 그 안에 모든 철학의 씨앗이, 그 이상이 담겨 있다.
모든 위대한 발견과 돌파구는 이 두 마디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궁금하다.
루소처럼 걷는 법
상상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삶은 더 이상 실패한 서사나 망쳐버린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진실이 아니다. 결말 같은 건 없다. 무한한 시작의 사슬만이 있을 뿐.
소로처럼 보는 법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신뢰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감각은 우리가 가진 전부인데, 최대한 잘 사용하면 되지 않나? 소로의 철학은 내가 보는 것이 곧 나라는, 아웃사이드 인 철학이었다. 소로는 초월주의자로 간주된다. 철학 사조 중 하나인 초월주의는 다음 다섯 어절로 요약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하지만 소로는 보이는 것을 더욱 굳게 믿었다. 실재의 본성보다는 자연의 실재에 더 관심이 있었다. 정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그럴 수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도 상당히 경이로우니,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소로는 지식보다 시력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지식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불완전하다. 오늘의 확신은 내일의 헛소리다.
“그게 무엇인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뿐이다.”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듣기
듣기는 연민의 행위, 사랑의 행위다. 귀를 빌려주는 것은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은 잘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 가능하다.
의지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지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요구는 고갈될 줄을 모른다. 모든 욕망이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그 갈망을 가라앉히거나 그 요구에 끝을 맺거나 그 심장의 끝없는 나락을 채우기엔 세상의 그 어떤 만족도 충분치 않다.
음악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음악은 감정의 본질을, 내용 없는 그릇을 전달한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구체적인 슬픔이나 구체적인 즐거움이 아닌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와 즐거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느낀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감정에서 추출한 정수"라고 표현한다. 슬픔 자체는 고통스럽지 않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무언가에 관한 슬픔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파 영화를 보거나 레너드 코헨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의 소음
‘읽다'를 ‘클릭하다'로 바꾸면 현재 우리가 겪는 고충이 된다.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그가 눈 돌리는 곳마다 사람들은 정보를 통찰로 착각하며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쾌락은 우리가 그 자체로서 욕망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 심지어 찰학까지도, 쾌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이 최고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어린아이는 무엇에 반응하는가? 쾌락과 고통이다. 불이 뜨겁다는 것과 사탕이 달콤하다는 것은 가르쳐줄 필요가 없다. 알아서 알기 때문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반사적인 행동이다.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두려움 없이 짚으로 만든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황금 의자와 호화로운 식탁을 앞에 두고 걱정에 빠져 있는 것보다 낫다.
우리는 새로운 쾌락에 익숙해진다. 그러면 새로운 쾌락은 더 이상 새롭지도, 그리 즐겁지도 않은 것이 된다. 우리는 특히 내가 ‘조금만 더-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취약하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더 많으면 된다. 하지만 조금 더 갖게 되면 우리는 눈금을 재조정하고 생각한다. 그저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우리는 얼마큼이어야 충분한지를 모른다.
충분히 좋음이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완벽함도 좋음의 적이지만, 좋음도 충분히 좋음의 적이다.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좋음의 신념을 따르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충분히'가 떨어져 나가고 그저 좋음만이 남는다.
간디처럼 싸우는 법
<바가바드기타>는 노력과 결과를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모든 시도에는 100퍼센트의 노력을, 그 결과에는 정확히 0퍼센트의 노력만을 기울일 것. 간디는 이 관점을 다음과 같이 짧은 단어로 요약했다. “욕망 없음.” 나태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욕망 없는 행위를 통해 해탈을 추구하는 카르마 요기는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많은 것을 한다. 결과에 대해 걱정하는 것만 빼고.
간디는 결과를 지향하지 않았다. 과정을 지향했다. 그는 인도의 독립이 아닌, 독립할 자격이 있는 인도를 추구했다. 일단 인도가 독립할 자격을 갖추면, 잘 익은 망고가 나무에서 떨어지듯 자유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간디는 이기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 자신이 싸울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싸움을 싸우기 위해 싸웠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과정 중심적인 접근법이 결과 중심적 접근법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이매진>은 공자가 상상한 유토피아 “위대한 조화"의 음악 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정함은 잔인한 의도가 아닌 상상력 부족의 결과다. 불친절한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며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못한다. 하지만 존 레넌은 말한다. 노력하면 어렵지 않아요. 공자도 말한다. “지위를 원하면 남이 지위를 얻도록 도와주고, 성공하고 싶으면 남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굴두는 말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친절의 힘을 기록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거의 성스럽기까지 한 책무라고. 냉철한 과학자인 굴드는 선함을 기록하는 데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고 봤다. 친절은 귀하게 여기면 더욱 늘어난다. 친절에는 전염성이 있다. 도덕적인 행동을 목격하면 신체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이 촉발되어 흘러넘친다. 친절한 행동을 목격한 사람은 더욱 친절하게 행동하게 된다. 이런 작은 행동으로 노벨상을 타거나 성인군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이다. 삼나무 씨앗에 떨어지는 몇 방울의 물이다.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우리는 확실성이 아닌 정반대에서 즐거움을 찾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하면, 삶은 꽤나 다르게 느껴진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낮에 회사에서 있었던 심란한 일은 하루의 끝에 이를 갈며 와인 한 잔을 더 마셔야 할 일이 아닌 축하할 일이 된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질병마저도, 신체적 고통이 계속될지라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미묘하지만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 세상이 전과 달라 보인다. 니체 또한 이러한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음을 인정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을 탐험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손에 맡긴다. 고압적인 상사나 변덕스러운 친구, 인스타그램 팔로워 같은 타이느이 손에.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이런 고난을 스스로 부여한 속박에 빗댄다.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타인에게 이양해 그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만든다.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 지금 당장.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
스토아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테니스 경기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기를 펼칠 것.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말 것.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실존주의자들에게 사람은 곧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더 이상의 반박은 없다. 우리는 온전히 실현한 기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추상적인 개념의 사랑이란 없으며, 오로지 사랑하는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천재란 없고, 천재적인 행동만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한 번에 한 붓질씩 자기 자화상을 그린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곧 그 자화상이며 “오로지 그 자화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스스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말 것. 스스로를 그려나가기 시작할 것.